2.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Jacques Marie Emile Lacan)이 한 말이다. 자기의 꿈과 욕망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려서는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학교에 입학해서는 선생님들이 바라는 대로, 커서 직장생활을 할 때면 조직이 바라는 대로, 그리고 결혼하면 배우자와 자식들이 바라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나의 세대는 그랬다.

내 욕망은 없고 타인의 욕망이 마치 내 욕망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회한에 젖곤 한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나는 지금 잘살고 있는 걸까?’, ‘앞으로는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한가?’처럼 사춘기 증상이 나타나는데, 보통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같은 성인병이 생기는 4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에 나타나기에 사십춘기(四十春期)라고도 부른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사십 대 후반에 사십춘기 증상을 심하게 앓았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시절 반장 아니면 부반장을 도맡아 했을 정도로 모범생이었던 나는 특별한 사춘기 증상을 겪었던 기억이 없다. 무난히 대학까지 졸업하고 남들이 선망하던 대기업에 입사했으며 뜻한 바 있어 창업까지 했으니 순탄한 길을 걸어온 셈이다. 하지만 순탄한 길을 걸어왔던 탓에 창업 후에 내가 마주하게 된 일들은 내 경험 밖의 일이었고 나를 많이 힘들게 했다.

2004년 8월, 내 나이 마흔에 지금의 회사를 창업했다. 머리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인적자원이 부족하고 자금 여력이 없어 소프트웨어 품질은 엄두도 못 내는 중소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들에 소프트웨어 품질을 확보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자는 의협심에 창업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시장수요는 얼마나 있을지, 사업성은 있을지와 같은 기본적인 조사나 분석은 하지도 않았다. 사실 그런 것을 해야 하는지도 당시에는 몰랐다. 돌이켜 보면 사전 조사가 충분하지 않았기에 기업들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소프트웨어 품질 개선 컨설팅이라는 서비스로 창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몰랐기에 용감했다.

회사를 창업하기 전인 2000년대 초반부터 주요 IT 일간지와 전문지에 소프트웨어 품질의 중요성 및 소프트웨어 품질이 확보되지 않았을 때의 문제들과 해외 사례들을 정기적으로 기고했다.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세미나든 콘퍼런스든 그리고 지역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쫓아가 발표도 했다. 회사 창업 이후에도 이런 노력은 계속 이어졌는데, 공공기관이나 금융기관들이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구축한 IT시스템에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산업계에서도 소프트웨어 품질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한 군데 두 군데 기업으로부터 소프트웨어의 품질을 개선하기 위한 컨설팅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니 사업 초반에는 정말 힘들었다. 컨설팅은 IT시스템 구축처럼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대부분 교육과 보고서 형태로만 결과물이 남아 기업들이 비용 지급을 꺼렸다. 거기다가 앞선 사례가 거의 없어 자료 대부분을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밤을 새우고 주말까지 일하는 날들이 많았으나, 그래도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 간다는 성취감에 버틸 수가 있었다.

이런 노력으로 사업이 조금씩 확장하면서 처음 셋이서 시작한 회사에 직원도 하나둘씩 늘어 갔다. 셋일 때는 셋만 먹고살면 되니까 한두 개 사업을 하면서 번 돈으로 월급 주고 좀 많이 벌었다 싶으면 상여금 주고 하면 됐다. 그다지 관리가 필요하지 않았다. 인원이 늘어나니 내부적으로는 매월 감당해야 하는 인건비와 경비가 많아져 세무회계 관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고 직원들에 대한 관리도 필요해졌다. 대외적으로는 더 많은 사업을 수주해야 하니 고객관리와 영업 관리도 필요해졌다. 컨설팅 서비스라는 업무 외적으로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아지며, 사장인 나에게 경영 능력이 요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 초년생일 때 은행을 다니며 조직을 배웠다면 LG-EDS(현 LG CNS)에서 소프트웨어 품질이라는 업무를 배웠고 투이컨설팅에서 컨설팅 사업을 배웠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나만 열심히 하면 될 일이었다. TQMS라는 지금의 회사를 설립하고 비로소 경영을 배우게 됐는데, 경영은 나 혼자 열심히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나보고 경영을 한 단어로 정의해 보라고 하면, 나는 서슴지 않고 관계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경험한 경영은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직원과의 관계, 고객과의 관계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나와 회사 대표로서의 나와의 관계이다. 대기업은 아니 중견기업만 하더라도 업무기능별 부서나 담당자가 있기에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업무를 수행하면 되지만, 우리 같은 중소기업은 대부분 사장이 다 해야 한다. 컨설팅회사의 사장은 영업 대표이자 컨설턴트이며 인사담당자이자 회계담당자이다. 심지어 사무실 청소도 앞장서서 한다. 물론 대기업처럼 업무영역별로 처리해야 할 업무량이 많지는 않기에 웬만한 업무는 그럭저럭 처리해내지만, 인력관리는 다르다. 사람에 대한 관리는 인원이 적다고 해서 수월한 게 아니다. 특히 나처럼 엔지니어로서 혼자 일하는데 익숙했던 사람에게는 매우 어려웠다. 

회사를 경영하는 것은 결국 사람 사이의 관계를 관리하는 것이다. 회사 직원을 관리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주장한 믿음과 의리와 예로써 직원을 관리하는 방법과 순자(荀子)와 한비자(韓非子)가 주장한 법과 원칙에 따라 직원을 관리하는 방법이다. 직원을 믿고 실적이 부족해도 기다려주고 호의를 베풀면 직원도 그만큼의 보답을 한다는 논리와 조직과 직원은 정해진 규칙과 성과에 따라 당근과 채찍으로 엄격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논리이다. 대기업 관리체제에 익숙했던 나는 성과 지향적 경영자였다. 성과에 따라 연봉과 상여금을 차등 지급하면 직원 간 경쟁심이 조장되어 더 열심히 일할 거로 생각했다. 대기업에서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문제는 우리 회사가 대기업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대기업은 인적자원이 풍부하고 필요하면 언제든 신규나 경력직원을 채용할 수가 있다. 대기업 입사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원을 규칙과 성과에 따라 다루는 게 좋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중소기업은 특히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요구하는 컨설팅 조직은 대기업처럼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우리 회사는 대기업을 다니다 옮겨 온 직원들이 대다수이다. 그들은 부품화되어 성과에 내몰리고 규율에 얽매이는 게 싫어 우리 회사에 왔는데 여기서도 똑같이 관리한다면 싫을 것이 당연하다.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고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사람마다 우선하는 가치가 다르기에 같은 잣대로 판단하거나 같은 방법으로 관리하면 안 된다. 초보 경영자였던 나는 인간에 대한 이런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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