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양심은 지키지 않았을 때 불편해지는 마음

회사 규모가 커지고 사업이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시장이 형성되었다는 거고 그러다 보니 경쟁사도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산업군도 마찬가지겠지만 컨설팅 시장에서 후발주자가 발을 들여놓는 가장 쉬운 접근법은 인맥을 이용한 영업과 저가 입찰 그리고 편법이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나이 서른이 넘어 한국에 돌아와서는 사업조직도 아닌 지원조직에서 회사 내부조직을 대상으로 업무를 수행했었던 나는 영업이라는 것을 몰랐다. 컨설팅은 전문성이 필요한 것이니 실력이 있으면 사업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자만했다. 그동안 소프트웨어 품질 확보의 중요성에 대해 전문지 기고나 외부 발표를 자주 해서인지 나와 우리 회사가 시장에 많이 알려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컨설팅 문의가 늘어나다 보니 별도의 영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실력이 있으면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맞다. 다만 영업력도 실력이라는 것을 간과했다. 정확히 얘기하면 영업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회사를 창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 국내 모기업으로부터 소프트웨어 품질 개선 컨설팅 제안을 요청받았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기업이었다. 이 회사에서 컨설팅을 수행했다는 자체가 상징성을 가질 만큼 훌륭한 레퍼런스를 확보하게 되는 절호의 기회였다. 제안서 작성에 정성을 다했다. 몇 날 며칠 밤낮으로 제안서를 작성했다. 사업추진 배경, 목적, 범위와 같은 기본적인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사업추진 전략 및 방법과 일정을 매우 상세하게 작성했다. 특히 사업추진 방법과 일정은 일주일 단위로 세분화해서 각 주차 별로 무엇을 누가 어떻게 진행하고, 그 결과로 어떤 산출물이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물 예시까지 제안서에 담았다.

제안설명회가 끝나고 발주기관 사업담당자로부터 우리 회사가 선정됐다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금 주중으로 내부품의를 진행하고 경영진 승인을 받으면 공문으로 사업자 선정 통보를 하고 계약을 진행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며칠 후 발주기관 담당자가 다시 연락을 해와서는 경영진께 보고를 드렸더니 평가 결과가 석연치 않다며 다시 제안설명회를 하고 재평가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바로 며칠 전에 우리 회사가 선정됐다고 알려준 담당자가 지금 와서 재평가받으라고 하니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선정 통보를 공문으로 받은 것도 아니었고, 아니 공문으로 받았다고 해도 대기업이 결정을 번복했을 때 우리 같은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막대한 변호사 비용을 감당하며 장기간에 걸친 소송을 할 것인가? 소송에 이긴들 이미 밉게 보인 상황에서 사업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별수 없이 두 번째 제안설명회를 했다. 우리가 실력으로 이겼던 만큼 다시 한다고 해서 별문제가 있겠나 싶었다.

제안발표를 위해 평가장에 들어가 짧게 인사말을 하고 제안내용을 설명하며 평가자를 둘러봤다. 지난번 제안설명회 때의 평가자들이 아니었다. 평가위원들이 전원 교체돼 있었다. 우리 회사는 사업자로 최종 선정되지 못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알게 된 사건의 경위는 이랬다. 우리 회사가 사업자로 선정됐다고 발주기관 사업담당자가 회사 경영진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이 회사의 전무인 연구소장이 다시 평가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당시 우리 회사의 경쟁사에서 전략적으로 영입한 부사장이 이 회사 연구소장과 막역한 선후배 사이였다. 많은 기업이 공공기관 출신의 고위급 관료나 대기업 출신의 임원들을 고문이나 자문역으로 영입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컨설팅받고자 하는 발주기관의 사업담당자는 아무래도 사업을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 이전에 유사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본 경험이 많고 시장에서의 평가도 좋은 컨설팅회사와 함께 일하는 걸 선호한다. 하지만 발주기관 처지에서는 컨설팅받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그래서 컨설팅회사를 선정할 때 기술과 가격 두 가지를 평가하는 게 일반적이고 가격 평가 비중이 전혀 작지 않다. 그러다 보니 컨설팅 시장에 뒤늦게 들어 온 후발주자들이 시장 진입을 위해 많이 사용하는 방법의 하나가 저가 입찰이다. 영업이익은 고사하고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매우 낮은 가격으로 제안을 한다. 지금 손해를 보더라도 일단 컨설팅 실적을 확보해서 다음 사업의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 물론 가격 평가 점수가 낮더라도 기술 평가 점수를 상대적으로 높게 받으면 사업 기회를 확보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우리 회사의 제안서와 컨설팅 결과물이 공공연히 시장에 나돌고 있고, 경쟁사도 우수한 인력들을 유치해 준비하기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제안서만으로 변별력 있게 기술력을 평가하기가 어려워진다.

여기에다가 후발주자인 경쟁사에서 발주기관 사업담당자가 매력을 느낄만한 제안을 하기도 한다. 보통 추가 제안이라고 해서 발주기관 사업담당자들을 해외 교육이나 콘퍼런스에 보내준다거나 사업수행에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컴퓨터나 고가의 소프트웨어 패키지를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내용을 제안서에 담는다. 영업담당자가 발주기관 사업담당자를 만나 계약이 체결되면 섭섭지 않게 보상하겠다는 모종의 거래가 이뤄지기도 한다. 발주기관 사업담당자가 컨설팅회사 영업담당자를 불러 거꾸로 요구하기도 한다. 컨설팅 사업비용은 점점 낮아지면서 추가로 지급해야 하는 비용은 늘어간다. 한번 단맛을 본 발주기관 사업담당자는 후속 사업을 빌미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이런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접대가 늘어가며 비정상적인 자금 지출을 위해 비자금을 조성하게 된다. 소프트웨어 품질 개선 사업을 수행하는 컨설팅회사들이 정작 자신들의 사업 품질은 떨어뜨려 가는 것이다.

우리 회사는 제품이나 시스템을 운영하는 소프트웨어의 품질을 향상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컨설팅회사이다. 지금은 모든 제품이나 시스템에 소프트웨어가 들어간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품이나 시스템에서 소프트웨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소프트웨어의 결함은 자동차 급발진 등 치명적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우수한 품질의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야 한다. 우수한 품질의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사람의 역량과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정교한 프로세스 그리고 개발 활동을 지원하는 기술이 상호 유기적인 조화를 이뤄야 한다. 나는 소프트웨어를 제대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개발하는 방법을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개발자들의 개발 역량을 평가하는 일을 한다.

예를 들어 여러분 조직의 사업이 확장하면서 기존에 수작업으로 관리했던 영업 사항을 전산화할 필요가 생겼다고 가정해 보자. 기존에는 사업 규모가 작아 여러분 조직이 판매하는 제품 품목, 거래처, 거래량, 매출, 비용 및 영업이익 등 영업 관련 기본 정보들을 수기로 관리했었지만 더는 어려워 전산시스템을 도입하기로 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상용 소프트웨어를 구매하여 사용해도 되지만 여러분 조직은 여러분 조직의 환경과 특성을 고려해 전문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를 통해 여러분 조직에 딱 들어맞는 전산시스템을 구축하기로 했다. 몇 개의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로부터 제안서를 받아 평가하고 업체를 선정해 전산시스템을 구축했지만, 사용하는 첫날부터 시스템에 여러 오류가 발생한다. 결국 사용을 중단하고 다시 업체를 선정해 재구축하게 됐다.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건 제안서만 보고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의 능력을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IT를 잘 모를 때는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우리와 같은 전문회사에 평가를 의뢰한다. 우리 회사가 발주기관을 대신해서 제안 업체들의 소프트웨어 개발 능력을 평가해서 알려주면 발주기관은 우리 회사의 평가 결과와 가격 등을 종합적으로 비교하고 판단해서 개발업체를 선정한다. 그런데 매번 이런 소프트웨어 개발 발주사업이 있을 때마다 평가를 의뢰하게 되면 개발업체 선정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추가적인 비용도 들어간다. 그래서 발주기관들은 아예 제안평가 항목에 소프트웨어 개발 능력을 평가하는 항목을 포함해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들을 평가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스스로 개발 능력을 입증해 보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들은 미리 우리 회사로부터 평가를 받아 개발 능력 수준을 부여받는다. 일종의 개발 능력에 대한 성적표를 발급받아뒀다가 발주기관에 제안서를 제출할 때 함께 제출하는 것이다.

소프트웨어 품질 인증이라는 제도 중의 하나인데, 우리 회사가 사용하는 것은 미국에서 개발한 모델이고 미국의 기관에서 인증을 관리한다. 현재 전 세계 100여 개국의 소프트웨어 산업계에서 사용할 정도로 공신력이 있다. 우리 회사와 경쟁사 몇 군데가 미국 기관으로부터 인증심사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아 미국 기관을 대신해서 인증을 부여하고 있다. 인증심사를 수행하고 능력 수준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따라야 하는 기준과 규칙이 있다. 하지만 인증심사라고 하는 것이 자격을 부여받은 심사원에 의해 이뤄지기에 심사원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만약 어떤 심사원이 인증심사를 요청한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와 이해관계가 있어 실제 능력보다 높은 점수의 인증을 부여했다고 해서 이를 밝혀내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심사원에게는 높은 윤리의식이 요구된다.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는 자신들의 개발 역량이 부족해도 높은 점수를 받기를 원한다. 그래야 제안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품질 개선 컨설팅 사업을 막 시작한 후발주자나 사업을 쉽게 수주하려는 컨설팅회사와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간 욕심이 마주하는 지점이다. 계약 조건으로 인증을 약속한다.

마이클 샐던은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여러 상황을 들어 독자에게 판단해 보도록 한다. 예를 들어, 기차의 기관사인 당신이 무섭게 질주하는 기차를 운전하고 있는데 앞에 두 갈래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에는 열 명 남짓한 어린아이들이 기차가 오는 줄 모르고 철길 위에서 놀고 있고 오른쪽에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놀고 있다. 그런데 당신이 운전하는 기차는 브레이크가 고장이 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방향을 선택하는 것뿐이다. 당신은 어느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런 윤리적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회사의 사업실적이 좋지 않아 자금 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도 매월 월급날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지난달까지는 은행 대출을 받아 직원 월급을 제때 지급했다. 통장에 잔액이 거의 없다. 더는 돈을 융통할 때도 없다. 이번 달 월급날은 다가오고 있다. 사장인 당신의 속은 시꺼멓게 타들어 간다. 이러한 때에 고객사에서 새로운 사업과 관련하여 협의할 게 있으니 만나자고 한다.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고객사 담당자를 만난다. 고객사 담당자가 은밀한 제안을 한다. 이번에 10억 원 규모의 사업이 발주되는데 우리 회사가 수주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계약되면 5천만 원만 자기에게 현금으로 달라는 요구이다. 10억 원 매출이면 비록 5천만 원을 주더라도 우리 회사 직원 10명에게 1년 동안 급여를 지급할 수 있는 금액이다. 만약 당신이 사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양심은 지키지 않았을 때 불편해지는 마음이다. 하지만 욕심이 이를 저버리게 한다.

회사를 창업할 때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던가, 회사 규모를 키워 주식 시장에 상장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단지 중소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들에 소프트웨어 품질을 확보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자는 소박한 목표로 창업을 했다. 그런 내가 치열한 경쟁시장에 휘말리면서 먹고 살기 위해 경쟁사의 행태를 어느 순간부터인가 따라 하고 있었다. 내 영혼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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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참 솔직한 글을 쓰셨군요. 현실이 가슴을 아프게 하네요. 그래도 살아남아야 하니 살 길을 찾아야지요. 적절한 선이 어디까지인지는 참 어려운 결정이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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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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