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인문학, 인간 본성에 관한 열정적 탐구

힘든 상황은 갑자기 몰려온다? 아니다. 조금씩 쌓여 오다가 더는 버티기 힘들 때 표면으로 분출하는 것이다. 표면으로 분출하기 전에는 반드시 징후가 나타난다. 이런 징후를 감지하고 대처하는 것도 경영자의 몫이다.

2004년 8월에 회사를 창업하고 처음 5, 6년은 불모지였던 소프트웨어 품질 개선 컨설팅 시장에서 자리매김하기 위해 정신없이 일했다. 창업 초기부터 함께 일했던 직원들만이 아니라 회사가 조금씩 커가면서 한두 명씩 추가로 영입된 직원들도 회사의 성장을 위해 힘을 더했다. 이직자가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의기투합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직자가 없다는 것이 모든 직원이 우리 회사에 만족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우리 회사는 사업 성격상 컨설턴트가 약 1년 정도 고객사에 가서 고객사 직원들과 함께 업무를 수행한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처음에는 우리 회사를 보고 컨설팅을 의뢰했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회사보다는 담당 컨설턴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소프트웨어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컨설팅을 받는 것에 대해 반신반의했던 고객사들도 컨설팅 결과로써 소프트웨어 품질 인증을 받고 이를 통해 대외 경쟁력을 확보하게 되면 계속해서 소프트웨어 품질 개선 활동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 외부 전문가의 도움이 효과적이라는 걸 체험했기에 컨설팅 계약이 만료되면 추가 계약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추가적인 컨설팅 범위나 일정, 비용 등에 대해서는 담당했던 컨설턴트와 자연스럽게 상의하게 된다. 고객사 사업담당자는 우리 회사와 함께 일한다기보다는 우리 회사의 컨설턴트와 함께 일한다는 생각이 더 크기 때문이다.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누구나 성장의 욕구가 있다. 지난 5, 6년간 우리 회사에서 컨설팅 업무를 수행하며 컨설팅 방법을 익혔고 회사를 경영하는 것도 어깨너머로 살펴봤다. 전문성을 가진 소규모 조직이다 보니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도 않는다. 마침 나에게 사업 기회를 주겠다는 고객도 있다. 창업해도 최소한 1년은 먹고살 수 있으니, 사업을 하며 다른 고객을 확보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우리 회사가 직원들에게 잘해 준다고 해도 자기가 직접 경영하는 회사만 하겠는가? 또 나이가 들어가면서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퇴직 이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결국은 자기 사업을 해야겠다는 결정을 한다.

나 역시도 나의 계획과 비전을 위해 은행과 대기업을 다니다 이직했고 컨설팅회사에서 컨설팅 사업을 배운 뒤에 지금의 회사를 창업했기에 회사 직원들의 창업에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인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기회가 되면 창업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하지만 회사의 고객사를 가로채는 것은 좀 아니지 않은가? 회사도 회사지만 그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되는 남은 동료들에게 못 할 짓이 아닌가?

회사 창업 후 7, 8년 차부터 직원들이 하나, 둘씩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후발주자 경쟁사들의 공격적인 영업으로 사업 기회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함께 일했던 직원 중 일부가 고객사를 안고 회사를 떠나다 보니, 회사 분위기도 좋지 않고 회사 경영에도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얄팍한 술수와 편법으로 사업을 하는 경쟁사를 욕하고, 회사를 배신하고 떠난 직원들을 원망했다. 나라고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 모든 문제를 그들의 탓으로 돌렸다. 사업에 대한 회의가 밀려오며 건강에도 적신호가 왔다. 당뇨, 고혈압과 같은 성인병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앞으로는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십춘기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내가 인간을 그리고 세상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순탄하게 살아 온 탓에 양심적이고 성실하게 다른 이에게 해 끼치지 않고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심적이고 성실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의 잣대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사람마다 입장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인간을, 그리고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처럼 내가 몸담은 IT 분야의 뛰어난 경영자들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고, 국내에도 인문학 공부에 대한 붐이 조성되고 있었다.

인문은 사람의 무늬, 즉 사람이 세상에 남기는 무늬를 의미한다. 따라서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사람이 새겨 놓은 무늬를 잘 따져서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이다. IT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자고 나면 새로운 개념과 용어가 쏟아진다. 나는 IT 분야의 컨설턴트이지만 컨설턴트라고 해서 모든 IT 기술을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고객사 경영진과 얘기하다 보면 최근의 IT 동향과 개념을 설명해 드려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그래서 평소에도 IT 관련한 공부는 꾸준히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핑계이겠으나 인문 서적보다는 IT 관련 서적을 주로 읽게 된다. 편식했던 탓에 충분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사십춘기를 심하게 앓게 됐던 것 같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님의 저서 “강의: 나의 동양고전 독법”을 읽고 고전에 매료됐다. 신영복 선생님이 추천하신 고전을 한 권씩 읽다 보니 이미 2, 3천 년 전에 성현들이 나와 같은 고민을 했었고 그에 대한 깨달음을 정리해서 알려주고 계셨다. 나는 그동안 오로지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해 앞과 위만을 바라볼 뿐, 우정과 사랑과 진리를 나누기 위해 옆과 뒤를 보지 않았다. 멈출 줄 모르는 속도와 낮출 줄 모르는 성장에 갇혀 정신없이 살아오다 보니 계획하지 않았던 멈춤과 의도하지 않았던 속도 저하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공자께서 소(韶)를 일러 말씀하시기를, “아름다움을 다하고(盡美) 또 착함을 다했다(盡善).” 하시고 무(武)를 일러 말씀하시기를, “아름다움을 다하고 착함을 다하지 못했다.”고 하셨다.

공자가 순(舜)임금의 악곡인 소(韶)와 무왕(武王)의 악곡인 무(武)를 감상한 말로, 논어(論語) 팔일편(八佾篇)에 나온다. 원문에는 다할 진(盡)이 아닌 참 진(眞)자를 사용해 진미진선(眞美眞善)이라고 나와 있다.

요(堯)임금에게 자리를 물려받은 순임금은 다시 임금 자리를 우(禹)임금에게 물려주었다. 순임금의 그러한 일생을 음악에 실어 나타낸 것이 소라는 악곡이었다. 순임금이 이룬 공은 아름다웠고 그의 생애는 착한 것의 연속이었다. 그러므로 그 이상 아름다울 수도, 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반면, 무왕은 은(殷)나라 주(紂)를 무찌르고 주(周)나라를 창건한 사람이다. 그가 세운 공은 찬란하지만, 혁명이란 방법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과정은 완전히 착한 일은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름다워도 동기와 과정만은 완전히 착한 것이 될 수 없었다. 결국 미는 이룬 결과를 말하고 선은 그 동기와 과정을 말한다. 아름다움의 근본은 선이다. 선이 없는 아름다움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선은 추(醜)나 악에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완벽한 아름다움이란 선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셨다. 결과 못지않게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 이외의 다른 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우리 문화의 역사와 기존의 관행 그리고 권력구조와 보상체계 전체를 무시한 것이다. 기업경영과 관련한 모든 상식을 무시하는 것이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고 마땅히 사회에 환원한다. 아름다운 결과(美)이다. 하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담합, 탈세, 비자금 조성, 분식 회계, 갑질, 뇌물상납, 노동 착취와 같은 비양심적인 행위를 저질렀다면 전혀 착하지(善) 않다. 착하지 않으니 아름답지도 않다.

신영복 선생님이 나를 동양고전 속으로 안내해 삶의 방향을 일깨워줬다면, 특정한 종교나 전통적인 사상에 속하지 않는 영적 교사인 에크하르트 톨레는 그의 저서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를 통해 나를 영성(靈性, 인간 삶의 가장 높고 본질적인 부분이며 진정한 자기 초월을 향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역동성을 통합하려는 고귀하고 높고 선한 것을 추구하는 삶의 실제)의 세계로 인도했다. 모든 문제와 불행의 원인인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의 자유와 기쁨”에 이르는 단순하고 심오한 메시지에 매료된 나는 이후 법정 스님과 달라이 라마, 아잔 브라흐마로부터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동양고전을 공부하며 공책에 정리했던 내용 중 일부. 2012년


영적 교사들의 말씀의 결은 조금씩 달랐으나, 결국 만나는 한 지점이 있었다. 자기 삶을 단순하게 만들려는 미미한 시도를 통해 나 스스로가 더 단순하게 살아야, 혹은 그렇게 살기로 선택해야 정말 중요한 모든 면에서 빈곤하고 결핍된 삶이 아닌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삶을 단순화하면서 그동안 나로만 향했던 에너지를 타인을 향해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경쟁에 내몰리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은 마치 한겨울에 두껍게 꽝꽝 언 호수 바닥이 쨍하고 갈라지는 소리처럼 명료한 메시지로 다가왔다. 그동안 내 무의식의 기본 바탕은 경쟁과 승리라는 패러다임에 속해 있었던 모양이다. 내 의식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내 무의식은 그것이었나보다. 심연의 한복판에는 ‘이곳은 전쟁터이고 날마다 나는 싸워야 하고 그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라는 생각이 나를 강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모든 비즈니스는 고객을 돕는 사업”이라는 것이 올바른 명제라면, 경쟁은 고객을 돕는 힘에서 나와야 한다. 그 힘은 근본적으로 경쟁자들을 이기는 힘이 아니라 고객을 잘 돕는 힘이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의 경쟁자와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서비스의 수혜자가 우리에게 환호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모든 언어는 그 속에 사용하는 사람의 의식이 담겨 있다. 경쟁이라는 말은 레드오션에서 피 흘리며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각박한 언어이다. 우리는 푸른 바다로 나가야 한다. 다른 사람이 제공할 수 없는 것, 우리만의 차별성, 늘 바라고 있었지만, 그동안 충족되지 않았던 새로운 수요를 창조하는 힘, 그것은 경쟁이 아니라 고객에 대한 공헌이다. 영향력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줄 수 있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재능이 많으면 재능을 기부할 수 있다. 그때 선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 돈이 많으면 돈을 나누어줄 수 있고, 젊음이 있으면 젊음을 나누어줄 수 있다. 아이디어가 있으면 아이디어를 나누어줄 수 있고, 정보가 있으면 정보를 줄 수 있다. 가지고 있는 것, 그 자체로는 힘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먼저 자신을 위해 쓰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쓰고, 나아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때, 그것은 힘이 된다.

무엇이든 내가 가지고 있는 강점이 다른 사람과의 싸움을 전제로 한 전투 무기가 아니라 참여해 도울 수 있는 나만의 차별적 공헌을 의미할 때, 우리는 함께 일할 수 있고 즐길 수 있고 혼자서 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을 더불어 창조해낼 수 있다. 경쟁은 친구를 만들기 어렵지만, 공헌은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사십춘기에 접어들며 삶의 염증을 느꼈던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조금씩 찾기 시작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다소 추상적인 질문을 시작으로 나의 삶을 역사적으로, 전체적으로 그리고 내부로부터 들여다보게 해줬다. 덕분에 문제를 스스로 인식할 수 있었고, 핵심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단순한 질문은 구체화하여 ‘어떻게 사는 것이 나답게 사는 것인가?’, ‘가치 있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가?’ 등의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책들을 찾아 읽었다.

물론 내가 인문학 공부를 통해 이런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서 우리 회사의 사업이 더 잘되는 건 아니다. 경쟁사의 치졸하고 편법적인 영업 방식이 바뀌거나 오랜 기간 나와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고객사를 가로채서 퇴직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을 탓하기 전에 인간 본성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이미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건 줄일 수 있다. 경쟁사의 영업 방식이 치졸하다거나 직원들이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은 내 관점이지 그들의 관점은 아니기에 내가 아무리 그들을 원망하고 욕을 해도 바뀌는 건 없다. 나만 마음의 상처를 입을 뿐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놓아 버리는 마음으로 하라.
조금 놓으면 조금 평화로워질 것이고, 많이 놓으면 많이 평화로워질 것이다.
완전히 놓아 버리면 완전한 평화와 자유를 알게 될 것이다.
세상과의 싸움이 끝날 것이다. (아잔 차)

인간은 물질적 욕구(외적 목표)와 정신적 욕구(내적 목표)의 경계에서 방황한다. 부, 명예, 권력과 같은 외적 목표의 달성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고 이를 얻기 위해 젊은 시절 많은 것을 희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를 달성했다 해도 행복감은 잠시뿐이고 왠지 모를 허탈감에 빠져든다. 정신적 욕구의 충족과 같은 내적 목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같은 비용을 들여 명품 프라다 가방을 사거나 2박 4일 프라하 여행을 갈 수 있다. 프라다 가방을 사는 것은 소유를 위한 소비이고 프라하로 여행을 가는 것은 경험(체험)을 위한 소비이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소유를 위해 소비를 하면 소유한 순간 행복감은 높지만 이내 사라지는 반면, 경험을 위해 소비를 하면 경험은 계속 회상할 수 있어 행복감이 오래 지속된다고 하였다. 나는 이것을 깨닫는 데 오래 걸렸다. 젊은 날의 나는 프라하대신 프라다를 선택했었다.


이전글    3. 양심은 지키지 않았을 때 불편해지는 마음
다음글    5. 라이프 로드맵 2020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15. 덧붙이기와 에필로그

2.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10. 청춘(靑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