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들꽃청소년세상

나와 같은 사회복지 비전공자는 사회복지대학원을 졸업하려면 최소 120시간(2020년부터는 160시간으로 변경)의 사회복지실천 현장실습을 해야 한다. 아마도 졸업 후, 사회복지실천 현장에서 일하기 전에 사전 경험을 해 보라는 취지일 것이다. 사회복지 관련 전반적인 업무를 엿볼 수 있는 종합사회복지관이나 개인별로 관심이 있거나 연고가 있는 사회복지기관이나 시설에 신청해서 현장실습을 받고는 한다. 그런데 나처럼 나이 든 사람을 실습생으로 받으려고 하는 곳은 거의 없다. 실습생이 아니라 상전 모셔야 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 또래 동기들을 보면 주로 지역아동센터나 노인요양원 등에 가서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실습점수를 채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이왕 현장실습을 할 거면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취약계층 청소년을 돌보는 기관에서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현장실습 수업을 담당하고 계시는 교수님께 면담을 요청했다. 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들고 교수님을 찾아뵙고는 앞으로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을 위해 무료 청소년직업학교를 설립하려고 한다는 뜻을 밝히고 이에 적합한 기관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교수님께서는 현장실습을 위해 나처럼 직접 찾아와 면담한 경우가 처음이라며, 교수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들꽃청소년세상”을 추천해 주시고는 직접 연락해서 현장실습을 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셨다.

2017년 5월의 어느 날, 들꽃청소년세상의 김현수 이사장님과 조순실 대표님을 찾아뵈었다. 두 분은 부부로 함께 법인을 운영하고 계셨다. 현장실습은 9월부터 시작하는 가을학기 과정이라 시간상으로 여유는 있었으나,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소개를 받았으니 시간을 끌 이유는 없었다. 이미 교수님께 연락받으신 이사장님 내외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고, 낯선 환경에 내가 어색하고 불편해하지 않도록 시종일관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대해 주셨다. 법인의 이력과 하는 일에 대해 소상히 설명해주시고는 나에게 무엇을 해 보고 싶은지를 물으셨다. 나 또한 들꽃청소년세상을 방문하기 전에 법인 홈페이지를 통해 개략적으로 법인의 구성과 사업내용을 파악하고는 내가 할 수 있겠다 싶은 실습 안을 정리해 갔기 때문에 그것을 보여 드리며 말씀을 드렸다.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료 청소년직업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전 경험을 쌓기 위해 법인에서 돌보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IT관련 교육을 한다거나 지금 하는 컨설팅 경험을 살려 법인의 전체 프로그램을 관찰하고 개선방안을 모색해 보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이사장님께서는 당장 무엇을 하겠다고 정하는 것보다는 법인 산하 시설에서 하는 일들을 먼저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나 역시도 현장실습 동안 법인의 개별 프로그램 유형과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향후 내가 청소년들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좋을지를 알아보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꽃청소년세상은 서울, 안산, 군산의 3개 지부 산하에 19개의 시설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탄자니아, 네팔, 몽골에도 10개의 아동그룹홈(사회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아동과 청소년들을 각각 소수의 그룹으로 묶어 가족적인 보호를 통해 지역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나 제도)과 쉼터(주로 가출청소년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해주고 비행을 방지하고 지도하는 시설)를 개설하였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청소년들을 위한 돌봄, 교육, 자립 및 해외원조의 종합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1994년 돌봄이 필요한 가출청소년 8명과 함께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 지금의 들꽃청소년세상의 모태가 되었다. 현장실습을 하며 그동안 수업 시간에 그리고 대학원 동기들의 얘기를 통해서만 들었던 아동·청소년 보호시설 들을 방문하고, 일부 프로그램들은 직접 참여해 보며 몸소 체험하고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들꽃청소년세상 산하 시설을 방문하여 현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살펴보며 운영상의 애로사항과 어려움 또한 자연스레 알게 됐고, 이 어렵고 힘든 일을 기꺼운 마음으로 하고 계신 선생님들이 존경스러웠다.

현장실습을 하며 겪은 여러 경험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유독 인상에 남는 것을 떠 올려 보면 첫 번째는 경기도 안산에 있는 쉼터 “한신”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다. 청소년 쉼터 한신은 위기에 처해 있는 여자 청소년들을 현장 최일선에서 맞이하고 돌보는 곳이다. 주로 가정폭력이나 학교에서의 집단 따돌림, 심지어는 성폭력으로 상처받은 청소년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가 오갈 데가 없어 잠시 머무는 곳이다. 한신을 방문했을 때 중학생으로 보이는 한 여학생이 거실 한 귀퉁이 빈백(폴리우레탄으로 된 원단 안에 작은 충전재를 채워 넣어 신축성이 좋고 푹신한 의자. 형태가 고정적이지 않아 사람이 앉는 자세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형된다.) 위에서 뒹굴뒹굴하다가 내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쉼터 소장님, 운영 팀장님과 함께 약 1시간가량 시설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후 쉼터를 떠나려 할 때, 아까 그 여학생이 여전히 똑같은 자세로 있다가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세요!” 어찌 보면 무미건조한 인사일 뿐인데, 계속 마음에 남았다. 저 여학생은 어떤 가슴 아픈 사연을 갖고 있을까? 운전하며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시야가 흐렸다.

두 번째 기억은 거리의 위기청소년을 최일선에서 만나는 “움직이는 청소년 센터, 엑시트(EXIT)” 활동에 참여했을 때이다. 엑시트 활동은 특별하게 개조한 버스를 찾아온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밥과 간식을 제공하고 속옷이나 양말, 위생용품, 콘돔 등 긴급 상황에서의 물품도 지원해주는 한마디로 청소년들을 위한 119다. 거리를 배회하다 다친 청소년들을 위한 의료지원과 성범죄 피해 청소년들을 지원하는 활동도 한다. 병원 진료나 변호사 상담이 필요한 경우에는 낮에 만나 도움을 준다. 저녁 8시가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청소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주로 가출청소년들로 그동안 변변히 못 먹은 탓인지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먹을 걸 찾는다. 그런데 그 학생들 가운데 한 명은 가출한 지 얼마나 오래됐으면,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11월 초였는데, 그날따라 유독 추웠다.

다수의 사람, 특히 기성세대일수록 거리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나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대부분은 거리 청소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 주변의 여러 요인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일부 청소년들은 말투나 행동에서 폭력성을 보이기도 하지만 막상 얘기를 나눠보면 아직 어린 학생들이다. 그들에게는 따뜻하게 보듬어 줄 부모나 어른들이 필요한 것이다. 다른 엑시트 활동가들의 눈을 피해 버스 뒤로 갔다. 그리고 소리 죽여 울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들꽃청소년 자립식” 참석이었다. 무작정 청소년직업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내게 청소년을 위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준 행사였다. 들꽃청소년세상과 같은 아동·청소년 보호시설에 기거하는 아이들은 만 18세가 되면 시설을 떠나야 한다. 그 해에도 들꽃청소년세상에서 만 18세가 된 19명이 이제 세상으로 자립해 나가게 되었다. 자립식은 이렇듯 둥지를 벗어나 세상을 향한 첫발을 내딛는 아이들이 발표하는 소감과 각오를 듣고 격려하며 축하해 주는 자리였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안쓰러운 마음이 컸다. 만 18세면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나이인데, 과연 이들이 ‘세상이라는 무대에 홀로 설 준비가 되었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들꽃청소년세상의 “들꽃청소년 자립식”.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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