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사회적경제(Social Economics)

“이선생님처럼 기업을 경영하시는 분은 돈을 많이 벌어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부하시거나, 아니면 필요할 때 유능한 사회복지사의 도움을 받으면 되지 왜 직접 사회복지대학원에 다니고 사회복지 현장에 뛰어들려고 하십니까?”

사회복지대학원 입학 면접 때, 면접관이었던 교수님 한 분이 내게 질문했던 내용이다. 당시에는 뭔 이런 질문을 하나 싶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맞는 말씀이기도 하다. 물론 교수님께서는 사회복지하고는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IT기업 경영자인 내가 그것도 늦은 나이에 사회복지대학원을 다니겠다고 하니, 그 의지를 확인해 보려고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질문 내용을 곱씹어 보면 이것저것 어설프게 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잘하는 일을 하면서 우리 사회에 도움을 주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의미였을 수도 있다.

‘나눔과 꿈’ 공모사업에 선정되지 못해 실망은 컸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번 깨어난 나의 의식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우리 안에 잠재해 있던 의식은 한번 일깨우기가 어렵지, 깨어난 의식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는가가 우리의 운명을 실현하는가 아닌가를 결정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을 어떻게 하는가는 우리의 의식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2020년에 취약계층 청소년을 위해 무료 직업훈련학교를 열겠다던 다소 모호했던 목표가 보호 종료 청소년을 위한 자립 지원으로 좀 더 구체화했다. 남은 것은 어떻게 할 것이냐이다. 그런 면에서 ‘나눔과 꿈’ 공모사업은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일자리 구하기가 어려운 것은 비단 보호 종료 청소년만의 문제는 아니다. 중장년층의 정년은 점점 빨라지고 있고, N포세대(주거·취업·결혼·출산 등 인생의 많은 부분을 포기한 청년 세대를 일컫는 신조어)라 불릴 만큼 청년층의 구직난도 심각하다. 대부분 경제지표는 불황이 이어질 것을 암시하고 있어 취업난은 더욱 심해지고 조기 퇴직은 더욱 늘어 날 것이다. 그렇다면 취업이라는 좁은 문을 뚫고 들어갈 노력으로 조기 퇴직한 중장년과 청년 구직자 그리고 보호시설로부터 자립해야 하는 청소년들이 서로 협력하여 일자리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물론 창업이 취업보다 쉬운 것은 아니지만, 중장년의 경험과 청년의 패기가 합쳐진다면 그리고 거기에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가치가 더해진다면 일반적인 창업보다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중장년 퇴직자는 풍부한 사회 경험과 연륜이 있고 인적자원과 재원을 갖고 있다. 반면에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고 도전정신과 추진력이 부족하다. 청년 구직자와 보호 종료 청소년은 젊은 패기와 강한 도전정신이 있고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며, 무엇보다도 취업에 대해 절박함이 있다. 물론 끈기가 부족하거나 사회생활에의 적응이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서로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해 나가며 협력한다면 일자리 창출이 한결 수월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정부도 일자리 창출에 대해 강한 의지를 보이며 제도적으로도 많은 지원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나는 창업을 해 본 경험이 있고 지금까지 회사를 안정적으로 경영하고 있으니, 나의 이런 경험이 그들의 창업을 도와주는 데 보탬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돈을 벌기 위해 양심까지 저버리는 그런 기업가를 양성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 사회에 이바지하는 착한 기업가가 과정과 결과가 모두 착한(盡善盡美) 기업을 경영하도록 돕고 싶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시 사회적기업을 떠올리게 됐다. 지역사회 공헌 및 사회적 목적 달성을 위해 사회 취약계층에 사회서비스 또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정도만 막연하게 알고 있던 사회적기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사회적기업의 사업유형과 발전 방향 등을 알아야 창업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기업을 이해하려면 사회적경제부터 이해해야 하는데, 사회적경제에 대한 개념은 강남대학교 최중석 교수님의 ‘사회적경제학, 2019년’ 책을 통해 학습했다. 사회적경제는 사회적 가치를 우선한다. 이윤의 극대화가 최고의 가치인 시장경제와는 달리 사회적 가치를 우위에 두는 활동이다. 사회적경제는 1970년대 신자유주의 등장 이후 자본주의 시장과 국가에서 더 이상 해결해 줄 수 없는 빈익빈 부익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 개념이다. 자원고갈, 환경오염, 고용없는성장 등 경제적 위기나 사회연대의 부족, 복지국가 기능 약화를 보완할 목적으로 태동한 대안경제 활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개념은 1970년대 나타났지만, 유럽에서는 적어도 150여 년 이상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적경제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유럽 연합 각 회원국은 그 크기가 작건 크건 간에 각자의 전형적인 방법으로 사회적경제에 대한 영역을 구축해 오고 있다. 사회적경제는 단어의 의미대로 ‘사회적 목적이 포함된 거래행위와 그에 따르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제3섹터, 비영리 영역 또는 시민사회 영역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문제 해결 및 사회혁신의 중요한 동기를 부여하면서 세계적으로 확산하여 오고 있다.

사회적기업은 기존의 산업 및 경제 성장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경제 주체가 아니라 인류와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더불어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 지속 가능한 사회를 목표로 하는 가치, 즉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미 오래전부터 자본의 이윤보다는 사회공동체 구성원 또는 지역사회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사업이나 조직 활동이 있었다. 정치적 입김이나 개인적 목적을 배제하는 독립적인 운영구조, 인간과 노동을 먼저 고려하는 소득분배, 이해관계자가 함께 참여하는 민주적인 의사결정 등의 사회적경제 운영원리들을 토대로 협동조합을 운영하거나 공제조합 또는 결사체를 구성하고 비영리단체를 설립하여 활동해 왔다. 다만 사회적경제가 근래 들어 주목받고 있는 것은 정부 주도의 사회적경제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 이후 수도권의 빈민 밀집 지역에서 진행된 주민운동이나 1990년 후반 외환위기 시절 활동가들의 실업 극복 및 빈곤 해결의 담론과 실천들이 2000년대 들어 정부의 정책과 결합하고 촉진되었다.

사회적경제 조직은 이익을 극대화하기보다는 공동체의 관심 사항인 ‘사회문제 해결’ 또는 ‘사회혁신 추구’ 등 ‘사회적 목적’의 달성을 우선시한다. 사회적 활동 및 환경적 목표를 위하여 봉사하고, 사회 및 경제 환경의 변화를 추구하는 유연성과 혁신성을 갖고 있다. 사회적경제 활동을 영위하는 조직이 자본수익이 아닌 사회적 과정과 사회적 목적 달성을 조직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경영하는 개별 경제 주체를 사회적기업이라고 한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에 ‘사회적기업 육성법’을 제정하면서 사회적기업에 부합하는 적정한 요건을 갖춰 정부로부터 인증을 받은 기업만을 ‘사회적기업’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적 목적을 우선으로 추구하면서 재화나 서비스의 생산과 판매 등의 영업활동을 수행하는 기업이나 조직을 인증 여부와 상관없이 포괄적으로 사회적경제 기업 또는 사회적경제 조직이라고 부른다.

사회적 목적이란 조직이 수익 창출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목적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사회혁신을 추구하는 일을 조직의 주된 활동과 방향으로 삼는 것이다. 사회적 과정이란 조직이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금융 수단 또는 정치적, 경제적, 육체적 등의 여건이 부족한 사람들을 우선으로 고려하면서 이해관계자의 참여와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 협동과 연대 등을 조직 운영의 중요한 원리로 삼는 것을 말한다.

이론적인 내용만 보면 내가 생각했던 착한 기업 그 자체이기는 한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싶었다. 그래서 국내외 잘 알려진 사회적경제 조직과 기업들을 찾아봤다. 가난한 여성의 희망이자 전 세계 사회적경제 발전을 촉진한 ‘그라민은행’, 전기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태양광 시스템을 개발하여 가장 저렴하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조명 및 전력을 저개발국가에 대규모로 제공하는 ‘딜라이트’, 신발이 한 켤레 팔릴 때마다 취약계층 어린이에게 한 켤레의 신발을 기부하고 상처와 감염 및 질병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탐스’, 동력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과 자연의 순수한 스포츠 활동을 지원하며 환경보호를 최고의 기업 가치로 경영하는 ‘파타고니아’와 같은 해외 사례만이 아니라, 쿠키를 만들기 위해 장애인을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고용하기 위해 쿠키를 만든다는 ‘위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불평등 해소의 플랫폼 차별화전략으로 지역사회의 저소득층 및 다문화 가정 청소년을 위한 배움과 나눔을 실천하는 ‘점프’, 개인과 사회의 소중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에 숲을 만들어 가고 있는 ‘트리플래닛’, 물건의 재사용과 재순환을 도모하여 생태적이고 친환경적인 세상과 일상 속 나눔을 통해 지친 우리의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아름다운 가게’와 같이 이미 국내에도 많은 사회적경제 조직과 기업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더 이상 주저할 게 없었다. 인생 백세시대, 인생 2막을 자기 자신과 사회를 위해 일해 보고자 하는 중장년 퇴직자와 취업이 절박한 청년 구직자 그리고 보호시설로부터 자립해야 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사회적경제 기업 창업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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