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나눔과 꿈” 공모사업

어려운 환경에 처한 청소년들을 위해서는 돌봄, 배움, 자립의 3개 축이 상호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들꽃청소년세상은 지난 1994년 경기도 안산에서 8명의 가출청소년과 그룹홈을 시작하며, 위기의 거리 청소년들과 인연을 맺게 됐다. 이후 가정해체와 빈곤으로 가정에서 돌봄을 받지 못하고,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해 학교 밖으로 나온 청소년들에게 대안 가정과 대안학교를 통해 안정적인 생활과 배움의 기회를 주고 있다. 하지만 이렇듯 지난 30년을 한결같이 어려운 처지의 청소년들을 돌보고 가르치는데 헌신해 온 들꽃청소년세상도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해 안타까운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만 18세가 되어 들꽃청소년세상을 떠나야 하는 이른바 보호 종료 청소년에 대한 진정한 자립 지원을 못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 시책에 따라 자립정착금을 지원하고는 있으나, 현실적으로 아직 미성년자인 청소년들이 자립하는 데에는 역부족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들꽃청소년세상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공공자립시설 운영이나 인턴십 프로그램과 같은 자립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매년 2,500명 이상이 보호 종료되는 상황에서 이들을 수용하고 지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뿐만 아니라, 지원 프로그램의 성격이 대부분 자격증 취득이나 학원비 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실제 취업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문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다수의 보호 종료 청소년들은 열악하고 질 낮은 일자리에서 강도 높은 노동을 하고 월세방을 전전긍긍하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유혹의 손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비행 청소년이 되기도 한다.

자립은 단순히 경제적 독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혜령 교수에 따르면 “자립은 친부모를 떠나 대리 보호를 받던 위탁가정, 공동생활 가정, 혹은 아동·청소년 양육시설에서 만 18세가 되어 사회적 보호를 떠나는 청소년들이 성공적인 상호 의존의 성취로 자신의 독립된 상태를 이끌어 감을 뜻한다. 자신에게 편안하고 가족과 지역사회 그리고 사회 속의 의미 있는 사람들과 즐겁게 연계를 가지는 자기충족적이고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개별적 독립이라는 의미보다 다른 사람들과의 대인관계와 지역사회 자원을 잘 활용하여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독립상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미국과 일본은 보호 종료 청소년들이 자립을 위한 유예기간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고 퇴소 후에도 사후 돌봄이 기본적 의무이나, 우리는 보호 종료 청소년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후관리 프로그램이 매우 부족하다. 퇴소 청소년들의 경우 퇴소 후 처음 1, 2년간은 그래도 본인이 몸담았던 기관이나 시설에 연락하고 지내는 편이나, 시간이 지날수록 연락이 끊어진다고 한다. 자기를 보살펴줬던 선생님들이 다른 데로 옮겨 연락이 끊어지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사회에 나와 자리를 못 잡고 있다 보니 연락할 염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립은 혼자서기가 아닌 의존하기로 힘들 때 “도와 달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즉 그렇게 도움을 청할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도 보호 종료 청소년들은 정작 그들이 도움이 필요할 때 마음 편히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보호 종료 청소년들이 정서적으로 기댈 수 있고 실질적인 취업 준비를 통해 취업함으로써 진정한 자립이 가능하도록 전문적인 지원을 해줄 수 있는 기관이나 시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호했던 청소년직업학교의 방향이 설정됐다. “공부도 놀이도 직업도 삶도 재미있게!”라는 취지로 “재미난청소년센터”라고 이름을 붙였다. 재미난청소년센터의 미션은 보호 종료 청소년들이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매월 일정 비용의 학원비나 자격증 취득 비용 등을 지원해주는 단기성의 사업이 아니라, 체계적인 정규과정을 통해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훈련하고 이를 통해 취업으로까지 연계되도록 해주는 것이다.

보호 종료 청소년들의 진정한 자립을 위해서는 정신적 자립과 함께, 경제적 자립 또한 가능한 프로그램 구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정신적 자립 프로그램은 “무엇을 하면서 사느냐 보다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좋은지”에 초점을 맞춰 구성할 필요가 있다. 특히 보호시설 청소년들은 낮은 자존감과 사회성, 낮은 자기 주도성의 특성을 많이 갖고 있는데, 대부분의 자립 지원 프로그램은 이러한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는 청소년들의 눈높이가 아닌 어른들의 눈높이에서 프로그램이 만들어진 탓이기도 하다. 청소년 개인별 환경이나 능력, 관심사에 차이가 있기에 집체 교육보다는 소집단의 개별화 프로그램을 통해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면서 배울 수 있도록 구성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정신적 자립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과정에 보호 종료 청소년들과 함께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그들의 의견 반영뿐만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성취감을 느끼고 주변 동료들에게 자연스럽게 전달되도록 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경제적 자립 프로그램은 4차 산업혁명 시대 유망직업 및 관련 기업정보 제공, 그리고 청소년들 각자가 희망하는 직업에 대한 직무훈련을 통한 직접적인 취업 지원이다. 보호 종료 청소년들의 취업을 위해 내가 우선으로 초점을 맞췄던 기업은 사회적기업이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사회적기업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다만 대학원 마지막 학기 때, “사회적경제론”이라는 과목을 수강했는데, 사회적기업은 지역사회 공헌 및 사회적 목적 달성을 위해 사회 취약계층에 사회서비스 또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해서 일반 영리기업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보호 종료 청소년들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품고 있는 기업이 많은데, 그래도 사회적기업은 다르리라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사회적기업도 장애인이나 고령자, 이주노동자, 경력단절 여성들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으나, 보호 종료 청소년들에게는 일자리가 거의 제공되고 있지 않았다. 이는 다수의 일자리가 단순 업무라 청소년들이 꺼리는 탓이기도 하지만, 청소년들이 선호할만한 일자리라 하더라도 고용주의 청소년들 고용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기도 했다. 질풍노도의 청소년들이 일하다 사고를 치거나 책임감 없이 중도에 일을 그만두고 잠적하거나 하는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그래서 재미난청소년센터에서는 청소년들이 근무하기 적합한 사회적기업들을 발굴하여 업무제휴를 체결하고, 해당 사회적기업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직무능력과 직장인으로서의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약 1년간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갖추기로 했다. 그리고 약 6개월가량의 인턴십 과정과 이후의 사후관리를 통해 해당 기업에서 믿고 채용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려는 청사진을 마련했다.

재미난청소년센터 서비스 구성도. 2018년


문제는 재미난청소년센터를 설립하고 운영하는데 필요한 자금이었다. 교육장이야 지금 회사의 사무실을 개조해서 사용하면 되겠지만 프로그램 개발과 운영에 만만치 않은 비용이 필요했다. 거기다 보호 종료 청소년들이 취업하기 전까지 교육받으려면 일정부분 생활비도 지원해줘야 했다. 교육받느라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해 감소한 수입을 보존해 줘야 했기 때문이다. 비용을 어떻게 마련할지 고민하던 차에 대학원 교수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사회복지실천 현장실습을 담당하시는 교수님께서 내가 예전에 현장실습을 위해 면담했을 당시 청소년 사업에 관심이 있다는 걸 기억하셨나 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매년 진행하는 “나눔과 꿈”이라는 공모사업이 있는데 한번 지원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눔과 꿈 사업은 사회문제 해결에 혁신적이고 파급효과가 큰 사업을 발굴하고 지원하여 취약지역 및 소외계층의 삶의 질 개선과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으로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매년 진행하는 지원사업 중 규모가 꽤 편이다. “나눔” 사업은 기존에 진행되고 있는 사업의 진행방식이나 전달체계 변화를 통해 효율성을 도모할 수 있는 사업이고, “꿈” 사업은 기존에 시도되지 않았던 혁신적인 사업으로 시도가 의미 있는 사업이다. 나눔과 꿈 사업 모두 단기 1년과 장기 3년의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장기사업의 경우에는 선정된 기관당 3년간 최대 5억 원까지 사업비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주관하는 사업 중 지원 규모가 가장 커서 경쟁률이 매우 높다고 했다. 그간 컨설팅 사업을 하면서 제안서는 숱하게 써봤지만, 지금까지 이런 유형의 제안서는 써 본 적이 없었다. 거기다가 나는 의욕만 앞섰지, 관련한 사업을 수행해 본 경험을 보유하고 있지 않아 이 상태로는 제안을 해봤자 떨어질 게 당연했다. 그래서 청소년 돌봄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보유하고 있는 들꽃청소년세상 이사장님 내외분과 상의하고, 만약 사업자로 선정되면 내가 주도적으로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들꽃청소년세상 이름으로 제안에 참여하기로 했다.

사업계획서 양식의 각 항목을 항목별 작성 지침을 참고해서 채워나가는데, 생소한 용어와 요구하는 내용들이 많아 작성하면 할수록 더더욱 선정될 자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이때마다 사업계획서 초안과 수정본을 읽어 보신 이사장님 내외분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 까짓거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제안서를 제출했고, 신청기관 1,106개 중에서 12:1의 경쟁률을 뚫고 서류심사를 통과했다. 면접 심사 경쟁률은 2:1 정도라고 하니, 왠지 선정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발표 10분, 질의응답 10분, 이렇게 총 20분간 진행된 면접 심사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처음 제안에 참여할 때까지만 해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제안 경험을 쌓아보자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던 것이 사업계획서 작성에 노력을 많이 기울이고 그 결과로 서류심사를 통과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내 마음속에 합격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었나 보다. 불합격 통보를 받으니 ‘잘 모르면서 섣부르게 설치지 말고 보호 종료 청소년 자립 지원사업을 접으라는 뜻인가 보다.’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때가 2018년 12월 초였다. 한 해의 사업을 마무리하는 시점이라 공모사업 불합격에 연연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올 한 해 실적과 내년도 사업 전망 및 계획을 정리해서 1년 동안 회사를 위해 수고한 임직원들과 공유하고 격려하는 성과공유회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우리 회사는 보통 크리스마스 전에 종무식 겸 성과공유회를 갖고는 새해 시무식 때까지 약 열흘가량을 쉰다. 12월 21일에 회사 종무식을 하고는 넋 놓고 쉬었다. 쉬다가 “나눔과 꿈” 사업 면접 심사 때, 평가위원들이 질문했던 내용이 떠 올랐다. 3명의 평가위원이 각자 한가지씩 세 가지 질문이 있었는데, 그중 두 개의 질문이 합격 여부 결정에 영향을 준 듯싶었다. 하나는 당시 고용노동부가 “청년취업성공패키지”라는 청년 일자리 지원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활용방안은 고려하지 않았는가였다. 비단 청년취업성공패키지 사업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사전 조사를 충실히 했었더라면 보호 종료 청소년들의 일자리 지원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진행하는 사업들이 많았을 것이고 그러한 사업들의 활용방안이 제안서에 포함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사회적기업이 취약계층 청소년 채용에 호의적이지 않고 청소년들 또한 사회적기업 취업에 대한 만족이 높은 것 같지 않은데, 이에 대한 내 생각을 묻는 것이었다. 나도 사전에 예상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반기업보다는 사회적기업이 취약계층을 더욱 폭넓게 고용하고 있어 보호 종료 청소년에 대한 채용 기회도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나 보다. 사회적기업으로서도 전문성이 부족하고 책임감이 적은 청소년들 채용에는 부담이 있다. 그리고 청소년들에게 취업 기회만 있으면 일할 거라는 내 생각도 잘못된 거였다. 오랜 세월 보호시설에서 통제받았던 청소년들이 시설을 떠나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만약에 내가 그들의 처지였다면 무엇을 제일 먼저 하고 싶을까? 모두 다 그런 거는 아니겠지만 대다수는 자유롭게 노는 걸 바랄 거다. 이제 스무 살 안팎의 어린 청소년이지 않은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동안 보호 종료 청소년들의 자립을 지원하겠다는 의욕만 앞섰지, 충분한 조사와 준비는 턱없이 부족했고 불합격 판정을 받은 게 당연했다.

내가 그동안 우리 사회를 위해 하고자 했던 일들에 열정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십춘기 때 흔히 겪는 순간적인 감정일 뿐이지 않았나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열정(enthusiasm)이라는 단어는 고대 희랍어의 “안”을 뜻하는 “엔(en)”과 “신”을 의미하는 “테오스(theos)”에서 유래한 말이다(“내재하는 신”, 즉 “내 안에 신을 둔다”). 내 안에 신이 있으니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가. 열정이 있으면 내가 하는 일에 깊은 즐거움을 느낌과 동시에 목표와 비전의 요소가 더해진다. 목표나 비전을 달성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억눌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참여하고 있는 활동을 통해 나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고 깊어지게 하는가를 느낄 수 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이 “열정 없이는 어떤 위대한 것도 이뤄지지 않았다.”라고 말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반면에 열정이 없으면 목표나 비전을 달성하겠다는 집착이 생겨 “지금 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목표에 도달하는 것”만을 더 많이 원하게 된다. 실제보다는 형식, 즉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에 더 치중하게 된다.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은 감정인가 열정인가? 나의 2018년은 이렇듯 감정과 열정 사이에서 저물어 가고 있었다.

삶 전체의 여행은 궁극적으로는 이 순간에 내딛는 발걸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언제나 이 한걸음이 가장 중요하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무엇을 만나는가는 이 한걸음의 성질에 달려 있다. (에크하르트 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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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지난 번에 말로 들었을 때보다 글로 읽으니 더욱 진정성을 느낄 수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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